코이카 단원은 반기별로 1회씩 활동보고서를 좀 거창하게 작성해서 제출해야 한다.

이 중에서 꼭 한, 두 번 정도는 수필이나 자유양식으로 작성해서 제출해야 하는데, 내가 활동하고 있는 파라과이에서는 파견된지 1년쯤 되었을 때 작성하는 2차 반기 활동보고서를 자유양식으로 작성하게 되어 있다.


얼마 전 휴대폰을 초기화하면서 실수를 한 탓에, 연락처와 사진들이 모두 날아가는 일이 발생해 버렸다.

그래서 2차 반가 활동보고서를 글로 작성할 수 밖에 없었다.


2차 반기 활동보고서


2014년 7월 23일부터 지금 이 보고서를 작성하기까지 약 350일이 지났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1여년이라는 시간을 혼자 해외에서 보낸 것은 처음이다. 이틀에 가까운 비행시간, 3번의 비행기 탑승, 남미의 하늘을 지나가고, 남미의 땅을 밟아보고, 남미의 공기를 마시고, 우리나라에서 출국한 순간부터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어서 2번의 환승과 30시간 이상의 비행에서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덕분에 파라과이 도착 첫 날에 바로 잠자리에 쓰러지고, 빠른 시차적응을 할 수가 있었다.


지구 남반구에 위치한 남미 대륙, 그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파라과이는 겨울이었다. 단지 이틀 만에 생활패턴이 모두 바뀌어 버렸다. 캐리어 가방 안에 있는 겨울 옷을 꺼내 입게 되었고, 인터넷도 느려서 잘 되지 않았다. 영어도 잘 통하지 않는 이 나라에서 대화는 바디랭귀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파라과이에서 만난 첫 현지인 가족들과 파라과이 적응 훈련을 시작하게 되었다. 가족들의 도움 없이는 밖에 나가는 것도 어려웠고, 나의 행동, 삶 모든 것들이 현지인 가족들의 관심과 도움을 받으며 이루어지고 있었다. 약 한 달 동안 그렇게 나의 첫 현지인 가족들과 스페인어를 배우며 파라과이 적응훈련기간을 보냈다.


나의 스페인어 실력은 동기들 사이에서 가장 낮았다. 국내교육을 받으면서 스페인어 선생님도 나의 허접한 스페인어 능력에 혀를 내둘렀고,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말을 하셨다. 파라과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스페인어 실력은 한 달이라는 현지적응기간 동안 전혀 늘어나지 않았다. 빨리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하고 싶었지만, 나의 귀는 트일 생각도 없었고, 점점 스트레스만 늘어갔다. 반면 나의 동기들은 하루가 다르게 스페인어 실력이 늘어가고 있었다. 마음 속으로 동기들과 비교를 하게 되었고, 나의 스트레스는 점점 쌓였고, 한국어로 대화를 하는 것도 동기들과 대화를 하는 것도 스페인어를 익히는데 방해가 되는 것 같아서 말도 하지 않고 지냈다. 그렇게 동기들과 나 사이에 오해가 생겼고, 사이가 멀어졌다. 그런 상태로 OJT를 시작하게 되었다.

OJT는 기관장의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우리 기수에게 주어진 OJT는 약 10일 정도였는데, 지금 생각하기엔 적당한 기간이라고 생각한다. OJT 첫 날에 처음으로 나의 동료를 만나게 되었다. 보통 OJT 첫 날에 단원과 만나게 되는 기관관계자는 기관장 또는 Co-Worker라고 알고 있었는데, 기관장도 아니고, Co-Worker도 아닌 기관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나를 찾아왔었다. 나의 삼촌뻘로 보이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아저씨와 서로 간단하게 인사하고, 점심식사를 한 다음, 그의 차를 타고 수도 아순시온을 벗어났다. 차에서 나의 임지 꼬로넬 오비에도로 오는 3시간 동안 서로 다른 풍경을 보며 그렇게 서로 어색했던 그 분위기를 아직 잊을 수가 없다. 차 안에서 동료는 스페인어와 과라니어를 마구 섞어가면서 나에게 자기소개를 하였다. 이름은 Hector이고 브라질에서 유학을 10년 정도했다고 한다. 이때 나와 만난 삼촌뻘 정도 되는 동료가 나와 가장 친한 동료가 되었다.


OJT 생활은 기관장 집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기관장과 그의 가족들이 따뜻하게 나를 맞이해줬다. 내가 OJT 기간 동안 불편하지 않게 생활하는데 많이 배려해주었다. OJT 둘째 날에 기관장의 차를 타고, 첫 기관을 방문하였는데, 굉장히 거리가 멀었다. 기관장의 집은 임지 북쪽 끝인데, 기관은 남쪽 끝에 있었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데 굉장히 멀고, 위험했다. 기관장은 나를 데리고 기관 동료들에게 인사를 시켜주었고, 기관 시설을 보여주며, 설명도 해주었다. 나의 기관은 까아과수 국립대학교인데, 2007년에 설립되었으며, 총 8개의 단과대학이 있는 종합대학교라고 설명했다. 각 단과대학은 꼬로넬 오비에도 안에 따로따로 떨어져 있으며, 현재 기관은 모든 단과대학을 한 위치에 집중 시킨 캠퍼스 형식으로 발전 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 캠퍼스 부지는 임지 남쪽 끝에 있으며, 대학 본관 건물이 완성이 되었다고 한다. 나의 임지를 모두 돌아다니면서 각 단과대학을 방문하여 인사하고, 서로 소개하며 OJT 두 번째 날을 보내게 되었다.


OJT 셋째 날이 밝자마자 기관장 집에서 기관까지 걸어가보니 2시간 반이 걸렸다. 큰일이었다. 왕복하면 4~5시간을 허비하는 것이었다. 심각성을 깨닫고 셋째 날부터 바로 직접 임지를 돌아다니면서, 지역조사를 하고, 앞으로 내가 살 집을 찾는데 주력하기로 했다. 나의 기관 위치가 너무 멀고 위험해서 출퇴근하기 용이한 집을 찾는 일이 급선무였다. 하지만 기관은 빌야리까라는 Ruta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어서, 기관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마땅한 교통편도 없었다. 버스라곤 장거리 고속버스 밖에 없었다. 택시도 있었지만 빠듯한 생활비에 택시를 이용할 여유는 없었다. 최대한 기관과 가까운 곳을 구해보려 했지만 집을 구하기는커녕 세를 내놓은 집을 찾아보는 것 조차 어려웠다. Co-Worker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아무도 Co-Worker가 누군지 몰랐다. 그래서 나를 데려왔던 동료에게 부탁했다. ‘내가 앞으로 2년간 잘 활동하고, 기관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내가 편하게 살 집이 필요하다. 지금 집을 구해야 하는데 집을 구하기가 힘들다. 매일 세를 내놓은 집 3개씩 찾아서 나에게 알려줬으면 좋겠다.’ 나의 동료는 그렇게 도와주었지만 OJT가 끝날 때까지 집을 구하지 못했다. OJT가 끝난 후 남아있던 현지적응훈련일정을 마무리 한 후 정식단원 수료식이 끝나고 기관장 집으로 돌아갔다. 정식활동을 시작하고 약 한 달간 집을 구하러 다녔지만 집을 구할 수가 없었다. 결국 기관장 집에서 출퇴근을 하였다.


나의 근무지는 대학 캠퍼스 본관과 공과대학이었다. 대학 캠퍼스에서는 주로 행정과 관련된 업무를 진행하고 약간의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고, 공과대학은 대부분 수업이 진행되는 곳이었다. 야간 수업이 대학 캠퍼스 본관에서 끝나는 날이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문제였다. 집으로 가는 길에 가로등도 없고, 전조등이 고장 난 차, 오토바이가 나를 치고 갈 뻔한 적도 많았다. 이 문제에 대해서 몇 차례 관리요원에게 건의를 했지만 해결책을 제시해주진 않았다. 사무소에서는 단원이 활동하는데 문제가 생기면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원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극복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고, 사무소는 그렇게 되길 바라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사무소에 대한 기대를 줄여가며 2014년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정식단원으로 활동을 시작한 때가 2014년 9월이다. 이미 2학기가 시작하고 난 뒤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전기전력 단원으로 파견되어 기관에서 원하는 수업을 진행해야 하는데, 시기상 바로 진행 할 수가 없었다. 나를 적극적으로 도와 줄 Co-Worker도 누군지 몰라서 방황하던 중, 우연히 Co-Worker가 누군지 알게 되었다. 내가 Co-Worker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사무소에 연락을 하고, 기관장에게 물어보고 해서 Co-Worker 이름을 겨우 알게 되었다. Co-Worker의 이름은 Derlis인데 알고 봤더니 내 앞에 앉아 있는 동료였다. Co-Worker는 코이카 시스템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데다가 본인이 Co-Worker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렇게 나와 Co-Worker와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파라과이에서 대학교 수업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해서 수업 참가를 많이 했었다. 기관은 어떤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학교 수업은 어떤 커리큘럼으로 짜여 있는지, 교수들은 어떻게 수업을 가르치고 있는지, 학생들의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었다. 10, 11, 12월 총 3달 동안 수업을 참관하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정말 중요한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교실 뒤에서 조용히 수업을 듣고 있으니, 학생들이 나를 신기하게 보기도 하고, 말을 거는 학생들도 있었다. 아직 말이 서툴러서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지만 그들이 궁금해 하는 것들을 조금씩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학생들과 친해지기 시작했고, 기관의 구성원으로 좀 더 깊숙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이때 학생들과 대화도 하면서, 한가지 문제점을 깨닫게 되었는데, 본인들은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서 학교에 왔는데 파라과이라는 나라 안에서 엔지니어가 어떤 일을 하는지, 졸업 후에는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가장 친한 동료 Hector와 Co-Worker인 Derlis와 상의해서 수학여행 비슷한 프로그램을 계획하게 되었다.


Hector와 Derlis는 이 프로그램이 왜 필요한가에 대해서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지만, 나는 되지도 않는 스페인어를 몸짓, 발짓을 다 섞어가며 설명하였다. 퇴근하고 집에서 기관장에게 프로그램을 설명하고 이 부분에 필요한 것들을 지원해달라고 설득을 하였다. 그래서 결국 나는 당일치기 수학여행 프로그램을 만들고, Hector는 25인승 미니버스 렌트비용을 알아보고 예산을 받아서 새벽 3시에 출발하는 약간 무리한 일정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다. 이 여행으로 인해 학생들은 태어나서 처음 이따이뿌댐을 방문하였고, 세계에서 가장 큰 댐이 파라과이에 있다는 것, 이것을 이용해 파라과이 전역에 전기를 공급하고, 남는 전기를 주변국에 수출을 하고, 이 모든 것들 것 가능하게 한 것이 엔지니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게 되는 좋은 효과를 보게 되었다.


파라과이는 12월부터 3월까지 여름이다. 이 기간에 보통 학교들은 여름방학을 하고, 휴가를 떠난다. 나는 방학을 활용해 다음 학기 수업을 위한 자료를 만들기로 하였다. 기관에서는 마이크로 프로세서, 자동화 시스템, 로봇 제어 같은 수업을 해주길 바라고 있었는데, 수업자료를 만들면서 고민을 많이 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부분이 많았다. 마이크로 프로세서, 자동화 시스템, 로봇 제어는 실습이 필요한 수업들이다. 하지만 기관에는 수업을 할 만한 실습실이 없었다. 수업참관을 할 때 나의 동료들도, 학생들도 실습수업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나에게 많이 하였다. 다음 학기 수업 준비보다 실습실 구축을 현장사업으로 추진해보기로 하였다. 이 부분을 Co-Worker인 Derlis와 이야기를 나누고, 어떻게 진행 할 것인가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첫 단계로 정보를 구해야 했다. 나의 임지에는 자이카가 지어준 직업훈련원이 있었다. 나는 기본 실습장비를 어디에서, 얼마에, 어떻게 구입하였는지 자문을 구해보고 싶어서 임지에 있는 직업훈련원을 Derlis와 방문을 하였다. 하지만 직업훈련원 자이카 사람들은 내가 코이카 단원이라는 것을 알고 직업훈련원 출입 허가를 해주지 않았다. 이 일로 인해 나는 현장사업을 꼭 진행해서 완료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Derlis와 의기투합이 되어 일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래서 새로운 학기는 나의 수업계획을 모두 취소 및 연기시키고, 현장사업 준비에 만전을 기하기로 하였다.


2015년 3월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고, 나와 Derlis는 바로 현장사업에 대해서 준비하고 진행하게 되었다. 나는 현장사업에 대한 모든 정보를 찾아보고, 구상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파라과이는 한국과 12~13시간의 시차가 발생한다. 그래서 한국과 연락하기에 굉장히 애매한 경우가 많이 생긴다. 여기 시간으로 밤 8시면, 한국 시간은 오전 9시 또는 10시인데, 내가 밤 10시에 기관에서 퇴근을 하면 한국은 낮 11시쯤이 된다. 집에 와서 씻고, 정리하면 밤 12시쯤이 되는데, 이때 한국은 점심을 먹는 시간이 되어서 결국 현지 시간으로 새벽 1시나 2시쯤이 되어야 제대로 된 연락을 할 수가 있었다. 3월, 4월은 그렇게 거의 밤을 새면서 지냈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하면서 알게 된 사람을 통해서 몇 군데 장비제작업체와 연결이 되고, 연락을 주고 받으면서 정보도 얻고, 심지어 어떤 업체는 국제택배로 카탈로그와 자료를 보내주었다. 이렇게 열심히 일을 잘 준비하고 있는 중, 코이카 사무소에서 Derlis에게 연락을 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왜 내가 새로운 학기에 수업을 하지 않는가에 대해서..


파라과이는 월 말이 되면 단원이 Co-Worker나 기관장과 협의하여 다음 달에 어떤 활동을 할 것인가에 대해 스페인어로 활동계획서라는 문서를 만들어 파라과이 코이카 사무소 관리요원에게 그것을 보내야 한다. 그 활동계획서에는 나의 서명과, Co-Worker나 기관장의 서명을 꼭 작성해야 한다. 그 말은 내가 다음 달에 어떤 활동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단원과 기관이 서로 함께 활동을 정했다는 신뢰의 표시다. 서로 믿음을 가지고 협의한 활동계획을 코이카 사무소 현지인 직원 전화 한 통화에 무너져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덕분에 나의 활동 계획서를 새로 작성하는데 계획되지 않았던 일을 계획하게 되어서 시간을 더 허비하게 되었고, 나는 굉장히 기분이 상했었다. 최소한 활동계획서에 의구심이 들어서 Co-Worker에게 통화를 했다면 최소한 왜 그렇게 계획을 세웠는가에 대해서 확인을 했어야 하고, 단원에게도 활동계획서를 왜 다시 작성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알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단원이 활동하고 있는 기관이 코이카 사무소 아래에 있는 듯한 그런 태도로 사회적인 기본 프로세서를 지키지 않은 모습으로 사회 경험이 없는 듯한 아마추어적인 일 처리를 하는 모습에 굉장히 불쾌했다.


어쨌든 짜증나고, 힘든 3, 4월을 넘기고 5월 말이 되어서 현장사업 계획서를 완성하게 되었다. 파라과이에서 현장사업 계획서는 다른 국가보다 좀 어렵게 작성이 된다. 보통 단원이 작성하는 한글로 된 현장사업 계획서만 제출하면 되지만, 파라과이는 자체 규정에 따라 한글로 된 현장사업 계획서 외에 기관에서 작성한 스페인어 현장사업 계획서도 함께 제출해야 한다. 파견된 지 6개월 밖에 안되어서 스페인어 실력도 한참 부족할 때 준비한 현장사업 계획서인데, Co-Worker인 Derlis, 가장 친한 동료 Hector, 그리고 나와 한 팀인 Alfredo, Edgar, Eugenia. 모두의 도움이 없었으면 나 혼자서 준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2015년 6월이 되어 현장사업 계획서를 제출하고, 1차 피드백 검사를 통과하게 되었다. 7월 16일이면 현장사업 심의회가 진행된다. 현장사업 심의회는 기관 관계자, 즉 기관장이나 Co-Worker도 현장사업에 대해서 발표를 해야 한다. 지금은 한참 발표 준비 때문에 나와 Derlis는 바쁘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파라과이 오기 전에 가장 많이 들었던 뜨랑낄로(Tranquilo)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뜨랑낄로라는 말은 편안한, 평온한, 평화로운, 걱정 없는 등의 굉장히 여유로운 뜻의 형용사다. 모든 것이 느릿느릿하고, 평온하고, 걱정 없는 삶을 사는 남미 현지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지금도 동료들과 Qué tal? 혹은 Cómo estas?하며 인사를 건네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뜨랑낄로라는 말이다. 심지어 뜨랑끼, 뜨랑끼라고 항상 입에 뜨랑낄로라는 말을 달고 사는 사람도 있다. 내가 활동하는 임지는 수도 아순시온에서 3시간 정도 떨어진 지방이라 더욱 느긋하고, 평온한 사람들이 많았다. 생각해보면 OJT때부터 모든 일들이 뜨랑낄로했다. 몇 시까지 만나자고 약속을 정했지만, 2시간이 지나서 나타나는 사람도 있었고, 오후 2시에 오후 수업이 시작되지만 1시간이 지나서 기관에 나타나기도 했다. 이렇게 항상 여유롭고, 평화로운 동료들을 데리고 어떻게 일을 원활히 진행을 할 수 있을지 고민에 빠졌지만, 그 해결방법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국내교육 받으면서, 파라과이로 출국하기 전, 인터넷으로 선임단원들의 사례를 검색해 보면서 현지인들의 뜨랑낄로한 성격 탓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프로젝트를 진행함에 있어서 많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적이 있었다. 심지어 현재 내가 활동 중에 있는 선임단원들도 현지인들의 여유로운 일 처리 모습에 실망한 모습을 보기도 하였다. 선임단원들은 모두 일을 진행함에 있어서 현지인들의 뜨랑낄로한 성격을 일을 하는 순간에는 바꿔보려고 했었던 것 같다. 나도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하고 온 터라, 한국식의 정확하고 빠르게 일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고, 현지인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었으며, 그렇게 일을 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동료들에게 억지로 한국식 일 처리 방법을 알려주는 것보다 다른 방법으로 일을 하기로 하였다. 그것은 바로 나를 현지인 동료들에게 함께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두 시간씩 걸어서 출퇴근하면서 이들과 같은 피부색이 되어간다는 것으로 생각하고 피부가 타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현지인들과 일단 외모로 비슷해지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다. 두 번째는 현지인들과 함께 살며, 똑같은 생활패턴으로 지내고, 뜨랑낄로라는 것을 나도 느끼는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고, 점심을 먹고 낮잠도 즐기고, 오후 늦게 간식도 먹고, 떼레레도 마시고, 밤 10시가 다되어 저녁식사를 하고, 밤 늦게까지 술 마시면서, 기타치고, 노래 부르면서 놀았다. 그래야 현지인들의 생활방식과 거기에서 나오는 생각을 이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는 한국의 모든 방법, 방식, 마인드 등을 지우고 현지인들의 방법, 방식, 마인드를 존중하고 받아들였다. 정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될 경우에만 다른 방법과 방식을 제시하고,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꼭 설명하고 이해를 시켰다. 하지만 절대 강요를 하지 않았다. 그들이 판단하여 선택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런 나의 노력은 주효하였다. 나의 동료들은 나를 단순히 코이카 봉사단원으로 생각하지 않고, 기관의 구성원으로 나를 받아주었다. 나와 한 팀이 된 동료들은 현장사업 계획서를 준비하면서 놀랄 만큼 정확하고, 빠르게 일을 처리하였다. 완료하기로 약속한 시간까지 일을 다 처리하였으며, 정해진 약속 시간을 결코 어기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늦을 경우에는 그 전에 미리 나에게 알려주며, 양해를 구하는 모습도 보였으며, 현지인에 대한 오해를 말끔히 씻을 만큼 열심히 따라와주었고, 현장사업 계획서는 잘 마무리되었다.


이제 2015년 7월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다. 7월 16일 현장사업 심의회와 7월 22일부터 현지평가회의가 남아 있다. 그 다음 8월부터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고, 현장사업이 통과된다면 수업과 함께 현장사업 완료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현장사업의 성공적인 완료를 위해 나 혼자 노력하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하지만 든든한 나의 현지인 동료들과 함께 진행한다면, 분명히 나의 현장사업은 좋은 결과를 거둘 것이고, 가장 성공한 사업으로 사례를 남길 것으로 믿는다. 앞으로 남은 1년여의 기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나의 활동을 마무리 할 것인지, 한국으로 돌아가서 어떤 새로운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해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하며, 이상 1년 동안 활동했던 나의 기록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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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 garyston (2015.12.01 00:28 신고)

    현지인들과 같이 생활하고, 그들의 동료가 되었다는 말이.. 참 멋지네요.
    뭉클합니다

    • LUIS92 (2015.12.01 09:14 신고)

      일단 현지인들과 친해지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으니까 모든걸 따라했죠.^^
      근데 언어는 아무리 해도 늘질 않네요. ㅋㅋ